미하엘 하네케의 추종자를 자처하면서 [히든]을 못 본 게 영 한이 되어(라기보다 가오가 안 선다고 생각했다), 이번 재상영을 노려 일찌감치 예매했다. 토요일, 전어를 구워 점심을 먹다가 "영화 보러 간다"고 했더니, 마덜이 "나도! 나도! 나도!"라며 강력한 참여 의사를 어필하셨다. "암울칙치구리(?)한 영화일 텐데 괜찮으시겠어요?"라고 했더니 "그런 영화 좋아한다"고 받아치신다. "[피아니스트] 감독 건데(나와 마덜은 함께 DVD로 [피아니스트]를 본 일이 있는데, 일명 모럴의 화신인 마덜은 큰 정신적 쇽크를 받으셨던 것이다)?" "(잠시 망설) 괜찮아 괜찮아! 너 혼자만 좋은 거 보러 다니고 나는 문화생활도 안시켜주고(후략)..."
원망의 깊이가 느껴졌다. 조만간 백건우나 강동석 리사이틀이라도 보내드려야 할 듯. 아무튼 급 예매하여 함께 영화관 나들이에 나섰다. 극장 안에서 같은 회를 관람했던 친구도 만났다.
이미 볼 사람은 얼추 다 본 상태일 테니 그냥 막 줄거리 언급해버릴 생각이다. TV프로그램 진행자인 조르주(다니엘 오떼이유)와 안느(줄리엣 비노쉬) 부부의 집에 이상한 것들이 배달되기 시작한다. 기이한 그림(입에서 피를 흘리는 아이, 목이 잘린 닭 등)과 부부의 집 대문을 움직이지 않고 몇 시간이고 찍은 영상이 담긴 비디오테이프가 그것(정말 정적인 롱테이크다. 이따금 이 집 식구가 들락 날락하는 모습만 있을 뿐). 집안으로 침입하거나 딱히 저주의 메시지가 담긴 것은 아니지만, 찜찜하다. 무릇 찜찜한 것과 위협이 되는 것은 한끝차이인 법. 게다가 익명의 전화까지 걸려오기 시작하자, 부부는 결국 경찰의 힘을 빌리기로 한다. 경찰은 '사고가 있어야 출동할 수 있는 거'라는 말이 되는 듯 안 되는 듯한 논리를 펼치며 부부를 그냥 돌려보낸다.
안느는 조르주의 팬이 벌인 짓이 아닐까 추측해볼 뿐이었지만, 조르주는 짚이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결국 문제의 '용의자'를 찾아 나서게 되는데, 그러면서 조르주의 유년에 드리운 작은 비밀이 모습을 드러낸다. 조르주의 부모는 그의 집에서 일하던 아랍인 부부가 사고로 목숨을 잃자, 그들의 아들 마지드를 입양하기로 한다. 조르주는 그것이 싫어서, 마지드에 대해 안좋은 말을 일러바친다. (나중에 밝혀진 것으로는 "입에서 피를 토한다"는 것과 "닭을 잡는 일을 하다가 나를 위협했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부모는 마음을 돌려 아이를 고아원으로 보낸다. 가기 싫다며 발버둥치는 마지드의 모습은 영화 거의 맨 끝부분에 무심한 원경으로 등장한다.
수십년 만의 만남은 어색하다. 자기가 한 짓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마지드를 조르주는 윽박지르고 협박한다. 이때 마지드의 말은 이 불친절한 영화에서 하나의 실마리 같다. "넌 하나도 안 변했구나." 다시 배달된 비디오테이프. 이번엔 둘이 언쟁을 벌이고, 조르주가 협박하는 장면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테이프가 직장 상사에게까지 배달되자 점점 신경이 곤두서는 조르주는, 결국 마지드 부자를 경찰에 넘긴다. 부자는 결백을 주장하다 유치장 신세를 진다.
한편으로 문제의 '협박' 테이프를 본 부인 안느는 충격을 받고, 남편에게 왜 솔직히 말하지 않았냐며 다그친다. 조르주의 불성실한 태도로 부부 관계는 점점 악화되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이들 부부의 외아들이 실종(후에 가출로 밝혀진다)되면서, 영화 속의 불협화음은 극단으로 치닫는다.
어느 날, 갑자기 마지드가 조르주를 부른다. 경계태세 가득한 말투로 왜 불렀냐고 묻는 조르주에게, 마지드는 "네가 이 자리에 있었으면 했다"고 한다. 그리고 "범인은 내가 아니다"라는 말과 함께 자신의 목을 칼로 헤집는다. 잘린 경동맥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구치고, 마지드는 그 자리에 쓰러져 즉사한다. 조르주는 망설이다 경찰에 신고하고 무죄판정을 받는다.
어느 날 조르주의 일터에 마지드의 아들이 찾아온다. 조르주는 피하려 하지만 결국 두려움 때문에, 그가 요구하는대로 '대화'를 하기로 한다. 조르주가 "네 아버지 일을 내 탓으로 돌릴 생각 말라"며 협박하자, 아들은 "그저 내 아버지의 교육기회를 빼앗은 사람을 실제로 만나면 어떨지, 배운 사람이란 건 과연 뭐가 다른지 직접 보고 싶었을 뿐"이라고 한다. 젊고 건장한 그의 눈에 드리운 건 명백한 경멸이었다.
쓰다 보니 길어졌지만(지병입니다), [히든]은 이런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하네케의 최고작으로 꼽는 [늑대의 시간]만한 충격은 아니었다고 해도, 역시 형님은 형님이었다. 얼핏 건조해 보이는 몇 개의 영상만으로도 능히 자아내는 강렬한 시각적 충격이 일단 하네케 표고, '경계'에 대한 문제가 그렇다.
[늑대의 시간]은 다양한 함의를 담은 풍부한 영화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난민 신세가 된 사람들(그중에서도 중산층 백인에 방점이 찍힌다)의 모습을 통해 '문명'과 '비문명'의 경계가 그 얼마나 위태로운지 암시하는 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히든] 역시 관객에게 '경계'에 대해 자각하게 하는 순간이 셀 수 없을 정도다. 예를 들면 이런 건데.... 집에 날아든 테이프와 카드가 그렇듯 조르주의 행동 역시 불법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보는 사람에게 강렬한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자, 찜찜함과 위협의 경계는 어디? 정당한 방어행위와 이기적인 강짜의 경계는 어디?
조르주의 부모는 마지드를 입양하려 했지만 결국 포기한다. 이 계기가 여섯 살 아들의 고자질 때문이었음이 밝혀진다. 하지만 '입에서 피를 토한다'는 이유로 철회할 입양이 애초에 오래 갈 수 있었을지 생각해 보면(마지드를 강제로 차에 태우는 그들의 모습은 자못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자, '선행'의 경계는 어디?
가출 후 돌아온 조르주와 안느 부부의 아들이 안느와 안느 부부의 친구 피에르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 전에, 남편 때문에 눈물짓는 안느를 위로하는 피에르의 모습을 스크린은 잠시 비춘 일이 있었다. 피에르는 안느를 안고 손에 입을 맞추며 달래고, 안느는 어딘가 선을 긋는 듯한 몸짓으로 잠시 후 자리를 떠난다. 나 역시 그 부분에서 아주 잠깐 '어라, 너무 친밀한 거 아냐'라는 생각을 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정보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곧 잊는다. 내 기억 속의 회색 그림은, 뒤를 잇는 아들의 비난 때문에 다시 상기되고, 소환된다. 그렇다면 적절한 친밀함과 부적절한 친밀함의 경계는 어디?
나한텐 기벽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수많은 '경계'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이런 건데... 나는 얼굴을 뽀얗게, 입술을 붉게, 속눈썹을 검게 칠한다. 이걸 '화장'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내 의식이 그게 맞다고 명령해서 얼굴을 붉게, 입술을 검게 칠하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건가?
나는 평범한 회사원이다. 그런데 어느날 내 의식이 그래도 된다고 명령해서 회의실 탁자에 편안히 드러누워 잠을 청하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건가?
상처의 딱지를 잡아 뜯고야 마는 심술궂은 성미 때문일까. 그래서 하네케 영화를 본다. 오만일지 모르겠지만, '무슨 이야긴지 알겠는' 몇 안되는 서사 중 하나기 때문이다. '누가, 어떻게, 왜'가 불분명한 상황이라고 해도, 모든 일은 결국 일어난다. 모두의 속내는 겹겹이 외피를 두르고, 발화된 순간 픽션이 된다. 유일한 현실은 비현실이고, 그 모호함만이 명백한 것이다. 언젠가부터 내게 재미있는 영화란, 바로 이런 영화들이었다.